추모내용 | 영동에서 전개된 3·1독립운동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어가던 중인 3월 25일 영동 장날에 계산리 등 읍내 여러 곳에 태극기가 배포되면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이날 만세시위는 확산되지 않았다. 4월 4일 오후 2시경, 다시 영동시장에 모인 2,000여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출동한 일경들이 해산을 강요했으나 군중들은 불응하고 독립만세를 더욱 고창하자 일경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사격하였다. 만세 군중들은 몽둥이로 맞서며 저항했으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날의 영동 3·1독립운동은 인근의 매곡·양산·학산·양강·용산·심천면 등지로 번저나갔다. 시위현장에서 장태호는 순국하였고, 체포된 정돈영·이낙연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72년 3월 4일 동아일보사는 영동군의 협찬을 받아 영동 군민의 3·1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