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체험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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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유한별 | 등록일 | 10.09.15 | 조회수 | 192 |
영국사 은행나무는 영국사 정문에서 동남쪽으로 200m쯤 떨어진 곳에서 자라며 그 앞은 논밭이다. 근처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충분한 수분의 공급을 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면적은 7,851㎡이며 1970년 4월 24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1000년 이상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나무의 높이가 35m, 가슴높이의 둘레가 10.8m이며, 서쪽가지는 땅에 닿아서 뿌리가 내렸으며 가슴높이의 지름이 20cm 정도 자랐고 높이도 3m가 넘었다. 가지의 길이는 동쪽이 7m, 서쪽이 7m, 남쪽이 13m, 북쪽이 6m 이며 첫째 가지의 높이는 2m이다. 나무높이 18m, 가슴높이 줄기둘레 6.1m, 가지퍼짐은 동쪽 7m, 서쪽 7m, 남쪽 13m, 북쪽 6m이다. 서쪽 가지가 땅에 닿아서 뿌리를 내린 기이한 현상은 다른 은행나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이런정확한 정보가 있으면 우리가족이 운동삼아 가는 천태산가는 길에 이런 멋지고 큰나무정보을 찾아서 알려주면 됬는데 말이다.또 서쪽가지가 땅에닿아서 쭈리를 내린기이한현상을 볼수있었으면 좋겠다 또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8년에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하였으며,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제23대 고종(高宗) 때 감역(監役) 안종필(安鍾弼)이 왕명으로 탑․부도․금당(金堂)을 중건하고,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라고 하였다. 영국사로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에 원(元)나라의 홍건적(紅巾賊)이 개성까지 쳐들어와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몽진(蒙塵)하여 국태민안의 기도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근위병들이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開京)을 수복하게 되자 왕이 기뻐하며 부처에게 감사드리고 떠나면서 절 이름을 영국사로 바꾸었다. 일설에는 조선 태조 때 세사국사(洗師國師)가 산명을 지륵, 절 이름을 영국이라 명명하였다고도 전한다 영국사도 문무왕이 다녀갔다는 사실은 몰르고 있었다 또한 영국사 보물이 이러게 많은것도몰랐다. 이런것들 영국사 부도(보물 제 532호) ,영국사 삼층석탑(보물 제 533호)영국사, 망탑봉삼층석탑(보물 제 535호) 등등 있다 다음에는 이런 보물을 보면서 찾아보면서 설명도 해야겠다는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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